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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 (성장 서사, 미장센, 엠마 스톤)

by riverwithhome 2026. 5. 14.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냥 화제성 있는 예술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다니까 한번 봐야지 싶었던 것이지,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심야 상영으로 혼자 들어가서,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가여운 것들'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본 기록입니다.

성장 서사, 그런데 이렇게 비틀어도 되나

'가여운 것들'의 이야기 구조를 한 줄로 정리하면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입니다. 빌둥스로만이란 한 인물이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해 세상을 경험하며 자아를 형성해가는 성장 소설의 고전적 형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한 인물의 성장기'인데, 이 영화는 그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설정을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죽은 여성의 뇌에 태아의 뇌를 이식해 다시 살려낸다는 설정 자체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직접 참조하고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모티프(Frankenstein motif)란 인간이 생명을 인위적으로 창조하면서 발생하는 윤리적 긴장과 창조물의 정체성 혼란을 다루는 서사적 장치입니다. 영화는 이걸 활용해 벨라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움직이다가, 욕망과 자유를 하나씩 발견하며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던 건, 이 성장 과정이 결코 무해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여성의 욕망과 자유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도 유머와 함께 다루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보다 보면 "이게 성장 이야기인가, 아니면 해방 선언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히려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에서 엠마 스톤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미장센, 눈이 즐겁고 몸이 피로한 이유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압도당하는 건 시각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카메라 프레임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감, 세트 디자인, 인물의 위치와 움직임 등을 총칭하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가여운 것들'의 미장센은 단순히 예쁘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피쉬아이 렌즈(fisheye lens)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피쉬아이 렌즈란 초광각 렌즈의 일종으로, 화면 주변부가 구형으로 왜곡되어 마치 눈알 안에서 세상을 보는 듯한 시점을 만들어냅니다. 이 기법이 영화 전체에 걸쳐 반복되면서, 관객은 벨라의 시선, 즉 세상을 처음 바라보는 기묘하고 왜곡된 눈으로 영화를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색채 설계도 매우 치밀합니다. 초반부는 흑백에 가까운 탈색된 화면으로 시작하다가, 벨라가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수록 화면이 점점 채도 높은 색으로 물들어갑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색이 감정의 성장과 같이 움직이는구나"라고 느꼈는데, 그게 예상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와닿았습니다.

다만 모든 장면이 이렇게 밀도 높게 설계되어 있다 보니, 후반부로 가면서 시각적 피로감이 생겼습니다. 계속 강한 자극이 이어지면 감각이 무뎌지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강조된 장면들이 강조처럼 느껴지지 않는 지점이 왔습니다. 이 영화가 한 번으로 완전히 소화되지 않는다고 느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가여운 것들'의 미장센에서 주목할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피쉬아이 렌즈를 통한 왜곡된 주관적 시점 구현
  • 흑백에서 고채도 컬러로 이행하는 색채 내러티브
  • 빅토리아 시대 고딕 양식과 초현실주의가 결합된 세트 디자인
  • 장면마다 그림처럼 구성된 대칭·비대칭 구도

엠마 스톤의 연기, 이 배역을 왜 받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생각한 건 미장센도, 스토리도 아니었습니다. 엠마 스톤의 연기였습니다.

퍼포먼스(performance), 즉 배우가 캐릭터를 실체화하는 연기 행위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영화에서 엠마 스톤이 해낸 것은 단순한 연기 이상입니다. 초반의 벨라는 말 그대로 아이입니다. 발음이 흐릿하고, 걸음걸이가 어색하고, 눈빛에 맥락이 없습니다. 이게 가짜처럼 보이지 않고 실제로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한 일입니다.

저는 이 배역을 받아들이는 결심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노출과 성적인 표현이 굉장히 직접적인 장면들이 많은데, 그게 단순히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벨라라는 인물의 탐색과 성장의 일부로 읽히게 만드는 것은 배우가 그 맥락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수준의 신체 연기와 심리 표현을 동시에 해내는 배우는 드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한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뜻하며, 좋은 영화일수록 이 변화가 설득력 있게 그려집니다. '가여운 것들'에서 벨라의 캐릭터 아크는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엠마 스톤은 그 궤적의 시작과 끝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소화해냅니다. 이 변화가 납득되기 때문에 영화 전체가 성립합니다.

영국 영화 연구소(BFI)는 '가여운 것들'을 2023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선정하며, 특히 엠마 스톤의 연기를 핵심 성취로 평가했습니다(출처: British Film Institute).

결국 이 영화가 불편하면서도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설정이 아무리 기괴해도, 그 안에서 벨라가 진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큰 기대 없이 심야 상영에 들어간 분이라면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편안하게 즐기는 영화를 원하신다면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화를 원하신다면,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합니다.


참고: -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가여운 것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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