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웃음보다 외로움이 더 오래 남은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딱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달달하고 가볍게 웃고 나오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관에서 보고 나오면서 든 생각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한 영화다"였습니다.

치호라는 인물이 불편하게 익숙했던 이유
영화 속 치호는 대기업 연구소에서 과자의 배합 비율을 연구하는 인물입니다. 이른바 식품 관능 평가(sensory evaluation)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데, 관능 평가란 맛, 향, 질감 같은 식품의 감각적 특성을 사람의 감각 기관을 통해 측정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숫자와 데이터로 과자를 분석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사람 감정은 영 모르는 인물이죠.
유해진 배우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방식이 굉장히 자연스러웠습니다. 말투 하나, 눈치 보는 타이밍 하나까지 실제로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관에서 봤는데, 치호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어색하게 간격을 두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점심을 늘 혼자 먹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대화가 항상 업무 이야기에서 멈췄습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퇴근하고 뭐 하세요?"라고 물었고, 그 선배는 한참 생각하다가 "그냥 과자 먹고 잔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치호를 보면서 그 장면이 갑자기 다시 떠올랐습니다. 오래 혼자 살아온 사람 특유의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 치호에게서도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이 캐릭터가 공감을 얻는 이유는 단순히 웃기기 때문이 아닙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1인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34.5%를 넘어섰습니다(출처: 통계청). 세 가구 중 하나 이상이 혼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치호처럼 일은 잘 하는데 인간관계는 점점 서툴어지는 사람들이 현실에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해진과 김희선, 설레지 않아서 더 현실적인 호흡
이 영화에서 두 배우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가 케미스트리(chemistry)입니다. 케미스트리란 배우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교류와 호흡을 뜻하는 영화 업계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케미스트리는 흔히 기대하는 뜨겁고 설레는 방식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이 굉장히 천천히 흘러갑니다. 서로의 외로움을 조금씩 알아가는 방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출 방식이 오히려 중년 이후의 연애 감정을 더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을 때의 연애는 설렘이 앞서지만, 나이가 들수록 연애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건 설렘보다 용기에 가깝더라고요.
김희선 배우에 대해서는 단순히 밝고 예쁜 역할로만 소비될 것 같았는데, 혼자 있는 장면에서 불쑥 드러나는 외로움의 표현이 꽤 섬세했습니다. 에너지 넘쳐 보이는 외면과 내면의 온도 차이가 자연스럽게 연기로 나왔다는 점에서, 두 배우 모두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를 잘 소화했다고 봅니다. 내러티브 아크란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감정적·심리적으로 변화해 가는 흐름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두 배우의 호흡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던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감정 표현이 과장되지 않고 일상적인 어색함 안에서 나온다
- 상대방의 외로움을 인식하는 장면들이 대사보다 표정과 침묵으로 전달된다
- 설레는 장면보다 함께 있는 것이 편안해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담백한 연출의 장점과 한계, 그리고 '7510'이라는 숫자
이한 감독은 완득이, 증인 같은 작품에서도 인물을 함부로 나쁘게 그리지 않는 연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 성향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갈등이 세게 터지지 않고, 인물들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어긋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저는 이런 연출 방식을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배경, 소품 등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연출 기법입니다. 이 영화는 대사보다 화면의 구성과 배우의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들이 많았고, 그 점이 특히 치호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잘 살아났습니다.
제목에 들어간 '7510'이라는 숫자도 그런 맥락에서 읽혔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숫자가 단순한 코드나 배합 비율이 아니라, 감정을 담은 기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감독이 일부러 설명을 아끼면서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게 한 방식이 꽤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갈등 구조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공식을 따라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초반에 쌓아 올린 신선한 감각이 중반 이후부터 다소 익숙한 흐름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랄까요. 차인표, 진선규 같은 배우들도 등장하지만 이야기 안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웃음 포인트로만 소비된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2020년대 들어 관객 평균 연령대가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그만큼 중년의 감정선을 다루는 작품의 수요가 늘고 있다는 의미인데, 이 영화가 후반부까지 초반의 담백함을 유지했다면 그 수요에 훨씬 더 잘 응답하는 작품이 됐을 것 같습니다.
달짝지근해: 7510은 엄청난 명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갈등이 세지 않고 전개가 잔잔한 편이라 빠른 템포를 원하는 관객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보고 나면 자극적인 장면보다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더 오래 남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조용히, 특히 오랫동안 혼자 밥 먹고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다고 느끼는 분이라면 치호라는 인물에서 묘하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참고: - 통계청 1인가구 통계 (https://kostat.go.kr)
-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장르별 관객 동향 (https://www.kof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