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봉한 '모아나'는 디즈니가 폴리네시아 신화를 원작으로 제작한 뮤지컬 애니메이션입니다. 일반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로맨스와 판타지 중심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선입견이 꽤 많이 흔들렸습니다. 바다와 신화, 그리고 한 소녀의 선택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예상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
폴리네시아 신화, 낯설어서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솔직하게 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이후에 찾아봤을 때도 배경 신화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니 폴리네시아(Polynesia) 신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제가 그때까지 접해온 신화라고 해봐야 단군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정도였거든요. 폴리네시아 신화는 태평양 중남부에 흩어진 섬나라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신화 체계입니다. 바다를 삶의 중심에 두고, 자연과의 공존을 신성하게 여기는 문화적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영화 속 반신반인(半神半人) 캐릭터 마우이는 실제 폴리네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문화 영웅 마우이(Maui)에서 따온 존재입니다. 여기서 반신반인이란 신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적인 감정과 결핍도 함께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강하고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버려진 기억을 품은 캐릭터라는 설정이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양 애니메이션이 유럽 문화권 신화를 주로 차용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모아나'는 그 범위를 태평양 문화권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달랐습니다. 의상의 문양, 항해 방식, 음악의 리듬까지 실제 폴리네시아 전통 문화를 고증하려는 노력이 보였습니다. 디즈니가 제작 과정에서 폴리네시아 문화 전문가 자문단 '오케아노스(Oceanos)'를 구성해 문화적 정확성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출처: 디즈니 공식 사이트).
예전에 여행 예능에서 남태평양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땐 그냥 풍경이 예뻐서 좋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바다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 자체라는 게 실감되더라고요. 그 차이가 꽤 컸습니다.
모아나와 마우이, 캐릭터가 설득력을 만든다
'모아나'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캐릭터의 구조입니다. 모아나는 디즈니의 기존 공주 캐릭터와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디즈니 공주는 외부의 조력자나 로맨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모아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입니다. 저는 이런 캐릭터 구조를 능동적 서사(Active Narrative)라고 이해했는데, 능동적 서사란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끌어가는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보는 내내 답답한 장면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우이는 처음에 자기 과시가 심한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뒤에 숨겨진 결핍이 드러나는 과정이 꽤 잘 짜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캐릭터를 보면서 자꾸 마동석이 떠올랐습니다. 외형도 그렇지만, 시크한 척하면서 슬쩍 던지는 농담 타이밍이 너무 닮은 것 같아서요.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모아나가 인상적인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외부 도움 없이 스스로 항해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주체성
- 공동체의 기대와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실적인 설정
-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라는 대사로 수렴되는 정체성 서사
- 반신반인 마우이와의 관계가 단순한 조력 관계를 넘어 서로 성장하는 구조
이 캐릭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목소리 연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런 뮤지컬 애니메이션은 자막으로 보는 편인데, 더빙을 하면 감정의 결이 많이 달라지더라고요. 특히 노래 장면에서는 원어 발성과 감정이 동시에 전달되는 편이 훨씬 몰입이 됩니다. 성우의 보컬 퍼포먼스(Vocal Performance), 즉 목소리만으로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전달하는 연기 능력이 이 영화에서 특히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과 바다 연출, 이 두 가지가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모아나'는 음악이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인 영화입니다. 뮤지컬 애니메이션(Musical Animation)이란 장르 특성상 노래 장면이 단순히 분위기를 높이는 게 아니라 서사 전개의 역할을 함께 수행합니다. 즉, 노래 한 곡이 끝나면 캐릭터의 심리 상태가 바뀌어 있는 구조입니다. 이 점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장치라고 봤습니다.
연출 측면에서는 바다를 표현하는 방식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사실 바다를 좋아하면서도 무섭습니다. 특히 깊은 바닷속은 제가 전혀 모르는 세계 같아서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드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바다가 살아있는 캐릭터처럼 등장합니다. 파도가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움직이고, 모아나를 돕거나 반응합니다. 이 연출이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바다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 풀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음악을 담당한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Hamilton)'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캐릭터의 내면을 멜로디와 가사 구조로 직접 설계하는 방식으로 유명한데, '모아나'에서도 그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실제로 '모아나'의 OST는 2017년 그래미 어워즈(Grammy Awards)에서 최우수 영상물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습니다(출처: Grammy Awards 공식 사이트).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모아나가 섬 밖으로 나가기를 망설이다 결국 혼자 바다로 나가는 장면에서 예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직전의 기분이 떠올랐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혼자 끝없는 바다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던 그 기분이요. 그때 제 경험상 막상 시작하면 별거 아닌 경우가 많았는데, 시작 전에는 왜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감각이 모아나의 망설임과 맞닿아 있어서 유독 공감됐습니다.
'모아나'를 단순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다시 생각해볼 만합니다. 성장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어른들이 보면 더 위로받는 구조입니다. 처음 보신 분이라면 자막 버전으로, 다시 보신다면 음악과 바다 연출의 디테일에 집중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두 번째 볼 때 보이는 것들이 꽤 있는 영화입니다.
참고: - 디즈니 공식 사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