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오면서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 오는 내내 "지금의 저는 과연 진짜 저일까?"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은 복제인간이라는 SF 설정을 통해 존재와 정체성이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던지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재밌는 영화가 아니라, 오래 남는 여운이 있었습니다.
원작과 영화의 차이, 그리고 제가 느낀 것
사실 저는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냥 봉준호 감독이라는 이름과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배우에 끌려 예매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하고, 영화는 제목부터 '미키17'로 바뀌며 서사가 상당히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원작은 익스펜더블(Expendable), 즉 반복적으로 죽고 복제되어 재출력되는 소모용 인간이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여기서 익스펜더블이란 우주 개척 과정에서 위험한 임무를 맡기 위해 죽음 이후에도 기억을 복원해 재생산되는 인간형 존재를 뜻합니다. 영화는 이 기본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시스템 안에서 도구처럼 소비되는 인간의 모습을 훨씬 더 강하게 부각시켰습니다.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영화 쪽이 원작보다 사회적 풍자의 밀도가 더 높다는 점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계급적 시선이 덧입혀지면서, 단순한 생존 SF가 아니라 현대 노동 구조에 대한 은유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원작 소설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영화보다 설명이 구체적일 것 같아서요.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동일한 기억을 가진 존재는 같은 인간인가
- 경험이 달라지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되는가
- 시스템에 의해 소비되는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하는가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와 정체성 문제
이 영화에서 로버트 패틴슨이 보여주는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같은 인물을 여러 번 연기하는 게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라고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달랐습니다.
미키17과 미키18은 얼굴은 같지만 행동 패턴과 감정 반응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이를 연기 이론에서는 캐릭터 분화(character differentiation)라고 부릅니다. 캐릭터 분화란 동일한 외형을 가진 인물이 각기 다른 내면의 결을 가지고 있음을 표정, 목소리 톤, 신체 언어로 구분해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패틴슨은 이 부분에서 굉장히 섬세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겁이 많고 소심하다가, 어느 순간 이상하리만치 용감해지는 모습이 진짜 사람 같았습니다.
저는 원래 복제인간이라고 하면 감정 없이 똑같은 존재만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속 미키들은 같은 기억을 가지고도 경험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처럼 변해갑니다. 그 점이 오히려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인간의 성격이 유전자보다 환경과 경험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행동유전학(behavioral genetics) 연구에서도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입니다. 행동유전학이란 유전자와 환경이 인간의 행동과 성격 형성에 각각 어느 정도 기여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실제로 일란성 쌍둥이도 성장 환경이 다르면 성격 차이가 상당히 벌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영화를 보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결국 제가 겪어온 일들 때문에 만들어진 건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을까요. 그 상상이 묘하게 불안하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봉준호식 블랙코미디와 미장센이 전달하는 것
봉준호 감독의 연출 방식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블랙코미디(black comedy)입니다. 블랙코미디란 죽음, 폭력, 불평등 같은 어두운 소재를 유머로 포장해 관객에게 웃음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장르적 기법입니다. '기생충'에서도 그랬지만, '미키17'에서도 이 방식이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들은 웃음이 나오는 장면에서 오히려 더 큰 불편함이 남습니다. 잔인한 시스템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코미디 요소가 섞여 있어서, 웃다가 갑자기 "내가 왜 웃고 있지?" 하는 자각이 생기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인 것 같았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역시 이 영화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색채, 배우의 위치 등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미키17'에서는 차갑고 좁은 공간, 반복되는 복도 구조, 인물을 멀리서 관찰하는 듯한 카메라 워킹이 두드러졌습니다. 이 시각적 언어가 미키라는 인물이 처한 소모적 처지를 설명 없이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만 똑같이 복제된 또 다른 내가 생긴다면 그건 진짜 나일까?" 하는 질문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미키17'을 보고 나니 그 대화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영화가 그 질문을 훨씬 진지하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으로도 이 문제는 개인 동일성(personal identity) 논의, 즉 시간이 지나도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래된 철학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존 로크는 기억의 연속성을 인격 동일성의 기준으로 보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 전제에 균열을 냅니다(출처: 한국철학회).
'미키17'은 SF 영화지만, 정작 가장 오래 남는 건 우주 배경이나 복제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진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나에 만족하고 있는가"라는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원작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이지만, 읽고 나서 보면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가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 소설도 한번 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복제 이후의 '나'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질문일 수 있으니까요.
참고: - 에드워드 애슈턴, 『Mickey7』(원작 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