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수 688만 명을 돌파한 범죄도시. 저는 개봉 직후 극장에서 봤는데, 솔직히 이 영화가 이렇게 오래 회자될 줄은 몰랐습니다. 단순한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던 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꽤 많은 걸 남긴 작품이었습니다.
실화 기반 세계관이 만들어낸 현실감
범죄도시가 다른 한국 액션 영화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이야기의 토대가 실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2000년대 중반 서울 가리봉동 일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조직폭력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은 영화 전체의 무게감을 다르게 만듭니다. 저도 영화를 보는 내내 "진짜 저런 일이 있었겠다"라는 감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여기서 모티브(motif)란 창작물에서 실제 사건이나 인물의 핵심 요소만 가져와 허구적 재구성에 활용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완전한 실화 재현이 아니라, 사건의 정서와 구조를 빌려오는 것입니다. 범죄도시는 이 방식을 잘 활용해서, 과장된 장면이 나와도 기본 정서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어 설득력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특히 가리봉동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당시 이 지역은 외국계 이주민 커뮤니티가 밀집된 지역으로, 조직 범죄의 사각지대가 형성될 수 있는 실제 사회적 맥락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 공간적 리얼리티(spatial reality), 즉 현실 공간이 가진 사회적 분위기와 지역성을 장면 곳곳에 녹여냅니다. 그래서 화면 속 골목이나 건물이 완전히 세트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강도 높은 폭력 묘사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도 몇몇 장면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하지만 중간중간 들어가는 유머 코드 덕분에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런 완급 조절이 688만이라는 관객 수를 만들어낸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범죄도시가 가진 현실감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00년대 중반 실제 조직폭력 사건을 모티브로 한 서사 구조
- 가리봉동이라는 실존 공간의 사회적 맥락 활용
- 과장된 액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현실 기반 정서
- 폭력성과 유머의 완급 조절로 유지되는 몰입감
장첸과 마석도, 두 캐릭터가 영화를 살린 방식
이 영화에서 저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결국 배우들이었습니다. 특히 윤계상이 연기한 장첸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알던 윤계상은 늘 밝고 웃음기 많은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런 흔적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등장하는 순간 말투, 눈빛, 미세한 표정 하나까지 전부 위협적입니다. 이 낙차(落差)가 오히려 캐릭터를 더 인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배우 연구에서 캐릭터 변환(character transformation)이란 배우가 기존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인물을 구현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관객은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 해당 캐릭터를 훨씬 강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윤계상의 장첸이 딱 그 케이스입니다. 기존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반전 효과가 컸고, 그게 장첸이라는 악역을 단순한 범죄 영화 악당 이상으로 만든 힘이었다고 봅니다.
마동석이 연기한 마석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지만, 단순한 물리력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만의 원칙이 있고, 거기서 나오는 묘한 통쾌함이 있습니다. 제가 특히 기억하는 건 후반부 클라이맥스 장면입니다. 잡느냐 도망치느냐 극도로 긴장된 순간에 마동석이 툭 던지는 유머 한마디. 저도 극장에서 그 긴장감 속에 있다가 그 장면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개그 장면 상당수가 마동석의 즉흥 연기(improvisation), 즉 대본 없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애드리브였다고 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분석에 따르면, 2017년 한국 상업 영화 흥행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강렬한 악역 캐릭터 설정이 반복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범죄도시의 장첸이 그 대표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캐릭터 서사의 깊이라는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물이 이야기 흐름을 위해 기능적으로 움직입니다. 주변 인물들의 개별 서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장첸과 마석도가 워낙 강렬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좀 더 입체적인 조연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남습니다.
직관적 액션 연출, 그 단순함의 명암
범죄도시의 액션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와이어 액션이나 컴퓨터 그래픽(CG)을 동원한 시각적 스펙터클보다는, 몸과 몸이 실제로 부딪히는 느낌을 강조합니다. 저는 이런 스타일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좀 의아했습니다. 현실에서 정말 저렇게 싸우나? 저는 실제 몸싸움 경험이 전혀 없어서 비교 기준 자체가 없습니다. 제가 싸운다면 아마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이 스타일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건 타격감(impact) 때문입니다. 타격감이란 화면 속 충격이 관객에게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듯한 감각적 효과를 말합니다. 과장된 연출보다는 묵직한 타격음, 적절한 편집 컷, 배우의 몸무게감이 결합될 때 만들어집니다. 마동석의 체격이 이 요소를 극대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마동석 배우의 액션 시그니처가 완성됐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연출 방식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빠른 전개, 짧고 강한 장면 전환, 군더더기 없는 구성 덕분에 극장에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대중 영화로서의 완성도가 높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구조가 단순해지는 건 분명 아쉬운 점입니다. "결국 더 세게 때려서 해결한다"는 패턴이 반복되면 적은 피로감이 쌓입니다. 그리고 이건 이후 시리즈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시리즈를 계속 보면서 느낀 건데,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공식을 선택한 시리즈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7년 흥행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범죄도시는 관객 만족도 조사에서 액션 연출과 캐릭터 매력도 항목에서 동년 개봉작 중 상위권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범죄도시는 목표가 명확한 영화입니다. 깊이 있는 서사보다는 강렬한 몰입과 통쾌함을 선택했고, 그걸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극장에서 함께 웃고 긴장했던 그 분위기가 먼저 생각납니다. 시리즈 전체를 이어서 볼 생각이라면 1편을 먼저 극장 큰 화면으로 경험해보는 것을 권합니다. 직관적인 타격감은 화면이 클수록 확실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