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영화가 이렇게 웃길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친구 추천으로 극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어두운 분위기의 액션 영화를 예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베놈(2018)은 일반적으로 다크한 빌런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오히려 두 존재의 티격태격하는 관계가 영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안티히어로 베놈, 원작과 영화는 얼마나 다른가
베놈은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 스파이더맨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빌런입니다. 원작에서 심비오트(Symbiote)는 먼저 피터 파커와 결합한 뒤 에디 브록에게 넘어가면서 깊은 증오를 갖게 됩니다. 여기서 심비오트란 숙주 생명체의 몸에 침투해 공생하는 외계 유기체를 의미합니다. 독립적으로는 생존이 어렵고 반드시 숙주와 결합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판은 이 전제를 과감히 걷어냈습니다. 스파이더맨과의 연결고리를 아예 제거하고, 에디 브록이라는 인물과 심비오트의 관계 자체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소니 픽처스가 당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와 별개의 세계관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지만, 저는 오히려 이 결정 덕분에 원작을 모르는 관객도 부담 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원작을 많이 바꾸면 팬들의 반발을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 베놈은 그 반례에 가깝습니다. 세계박스오피스 기준으로 베놈은 개봉 당시 전 세계 8억 5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스파이더맨 없이도 독립 캐릭터로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수치로 증명한 셈입니다.
영화에서 에디 브록은 탐사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 분야의 기자입니다. 탐사 저널리즘이란 기업이나 권력의 비리를 장기간 추적하여 폭로하는 심층 보도 방식을 가리킵니다. 에디는 이 직업적 특성 그대로,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실험을 파고들다 심비오트와 결합하게 됩니다. 전형적인 히어로 기원 서사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에디는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부분이 다른 히어로 영화와 확실히 달랐던 지점이었습니다.
베놈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심비오트와 인간의 공생 관계로 탄생한 복합 존재
- 숙주 없이는 단독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유기체적 한계 보유
- 빌런도 히어로도 아닌 안티히어로(anti-hero) 포지션
- 원작과 달리 스파이더맨과의 연결 없이 독립적인 세계관 구축
안티히어로란 전통적인 영웅의 덕목을 갖추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캐릭터를 가리킵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놈은 이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캐릭터였습니다.
톰 하디의 연기와 코미디가 단점을 덮은 방식
영화관에서 보면서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는, 웃음이 육성으로 나올만큼 웃긴 장면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디와 베놈이 머릿속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들은 공포나 긴장보다 실소를 유발했고, 주변 관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당에서 갑자기 이상 행동을 하거나 랍스터를 통째로 집어 드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납니다.
이런 장면이 자연스러웠던 이유는 결국 톰 하디의 연기력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실상 한 배우가 두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는 구조입니다. 포스터에 등장 인물로 "톰 하디"만 있는 것이 꽤 멋있기도 하네요. 화면에는 에디 브록만 등장하지만, 베놈의 목소리 역시 톰 하디가 직접 담당했기 때문에 두 인물 사이의 호흡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으로 두 캐릭터의 케미스트리(chemistry)를 성립시킨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케미스트리란 두 인물 사이에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교류와 호흡을 의미하는데, 베놈과 에디는 처음에는 서로를 이용하려다 점차 묘한 동료 관계로 발전합니다. 저는 이 관계를 영웅과 조력자보다는 성격 차이가 극단적인 룸메이트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반면 악역 칼튼 드레이크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리즈 아메드의 연기는 안정적이었지만, 캐릭터의 동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위험한 생체 실험을 밀어붙이는지에 대한 내면 묘사가 부족했고, 후반부 라이엇과의 대결도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시각효과 측면에서는 CG(컴퓨터 그래픽)의 완성도가 전반적으로 높았습니다. CG란 컴퓨터를 활용해 실제로 촬영할 수 없는 장면을 디지털로 구현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특히 베놈이 에디의 얼굴 위로 순간적으로 변형되며 대화하는 장면은 지금 다시 봐도 완성도가 높습니다. 다만 후반 라이엇과의 전투는 검은 심비오트끼리 뒤엉키는 장면이 많아 화면이 혼잡했고,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영화를 TV 재방영으로 두 번째 봤을 때, 처음에 그냥 지나쳤던 둘의 관계 변화가 훨씬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제 경험상 한 번 보고 끝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면, 그건 캐릭터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라고 봅니다. 콘텐츠 전문 분석 매체들의 분석에 따르면 베놈 캐릭터는 마블 IP(지적재산권) 중에서도 단독 세계관 확장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출처: IMDb). IP란 영화, 캐릭터, 스토리 등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가리키며, 마블이 이를 얼마나 전략적으로 활용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베놈은 스토리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부족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초반 전개가 느리고 악역의 존재감이 약하며 후반 액션의 동선도 다소 아쉽습니다. 그러나 에디와 베놈이 만들어 내는 관계의 온도가 그 단점들을 어느 정도 덮어 줍니다. 캐릭터 하나의 힘으로 영화를 끝까지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놈이 처음이라면 1편부터 시작하고, 캐릭터의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면 후속편까지 이어서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