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실망했습니다. 빌런이 너무 많고 이야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느낌에 앞선 두 편보다 재미가 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시 정주행하면서 스파이더맨3를 다시 마주쳤고, 이번에는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완성도의 한계는 여전하지만, 이 영화가 담으려 했던 감정의 밀도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심비오트가 드러낸 것, 피터 파커의 내면
일반적으로 스파이더맨3는 액션이 화려해진 대신 서사가 약해진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영화의 진짜 중심은 심비오트(Symbiote)였습니다. 여기서 심비오트란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 등장하는 외계 기생 생명체로, 숙주의 신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대신 감정과 공격성을 증폭시키는 특성을 가집니다. 쉽게 말해 내면의 욕망을 끌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검은 슈트를 입은 피터가 강해지는 모습이 통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과 말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남을 먼저 챙기던 사람이 점점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메리 제인에게 거칠어지고, 해리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피터가 거리에서 자신감에 취해 과하게 행동하는 장면은 지금도 호불호가 갈립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장면이 그냥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감독 샘 레이미가 일부러 선택한 과장된 연출이라는 점이 보였습니다. 심비오트가 일으키는 자아 왜곡(Ego distortion), 즉 자신이 실제보다 대단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심리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과장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의도는 충분히 납득이 됐지만 표현 방식이 다소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습니다. 피터가 결국 심비오트를 벗어던지는 장면은 제 경험상 단순한 슈트 교체가 아니라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는 순간으로 읽혔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한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서사 구조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퀀스는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내면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영화 속 피터 파커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심비오트 착용 전: 타인을 우선시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영웅
- 심비오트 착용 중: 욕망과 공격성이 증폭되며 관계가 무너짐
- 심비오트 제거 후: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과정
이 흐름은 단순한 히어로 액션 영화의 구조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드라마에 훨씬 가깝습니다. 토비 맥과이어가 흔들리는 피터를 자연스럽게 표현했기 때문에 이 변화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빌런 과잉이 남긴 아쉬움, 그리고 재평가의 이유
스파이더맨3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점은 역시 빌런의 과잉입니다. 샌드맨, 뉴 고블린, 베놈이 한 편에 모두 등장합니다. 저도 이 부분만큼은 아쉽다는 평가에 동의합니다. 좋은 빌런이 많다고 항상 좋은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샌드맨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본명 플린트 마르코는 악당이라기보다 생계와 가족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샌드맨의 서사는 모럴 그레이(Moral gray) 캐릭터, 즉 선과 악을 단순히 나누지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복잡한 인물 유형의 전형입니다. 병든 딸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설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모래 입자가 하나씩 모여 다시 인간 형체를 만드는 시각적 시퀀스는 지금 다시 봐도 완성도가 높습니다.
반면 베놈은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원작에서 베놈은 스파이더맨의 대표적인 숙적으로, 심비오트와 에디 브록이 결합해 탄생하는 안티히어로 성격의 빌런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비중이 너무 적었고, 에디 브록 캐릭터를 설명할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베놈이 나쁜 캐릭터여서가 아니라 단순히 한 편의 러닝타임으로 소화하기에 너무 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베놈만 단독으로 한 편을 맡겼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해리 오스본의 이야기는 시리즈 전체의 감정선을 마무리하는 축입니다. 친구였던 두 사람이 서로를 원망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함께 싸우는 흐름은 감동적이었지만, 이 역시 감정선을 충분히 쌓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서사적 밀도(Narrative density), 즉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적 무게를 담을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명백히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스파이더맨3가 시간이 지나면서 재평가받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를 비롯한 여러 영화 비평 기관에서도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부작을 슈퍼히어로 영화의 서사적 전환점으로 평가한 바 있습니다(출처: American Film Institute). 실제로 화려한 액션보다 용서, 화해, 후회라는 감정을 중심에 놓은 연출은 당시 장르 관습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또한 마블 스튜디오의 MCU 이전 작품들을 다룬 여러 영화 학술 연구에서도 이 시리즈의 인물 서사가 이후 슈퍼히어로 장르 발전에 미친 영향이 꾸준히 언급됩니다(출처: IMDb 영화 정보).
스파이더맨3가 가진 아쉬움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완성도만으로 영화의 가치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다시 보고 나서 더 강해졌습니다. 욕심과 분노에 흔들리면서도 결국 자신을 이겨 내는 이야기는 세월이 지나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건드립니다.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시 보실 계획이 있다면 스파이더맨3는 건너뛰지 말고 꼭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1편과 2편을 보고 나서 이어 보면 피터 파커라는 인물의 완성이 어떤 의미인지 훨씬 선명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진심으로 담아낸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