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뮤지컬을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위키드라는 뮤지컬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 영화의 내용도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 후, 그 어떤 뮤지컬보다 관심가는 스토리가 되었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감정선
제가 직접 봐보니, 위키드는 뮤지컬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핵심 문법은 이른바 다이제시스(diegesis) 방식의 음악 연출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이제시스란 극 중 인물이 음악의 존재를 인식하며 직접 노래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배우가 배경음악에 맞춰 춤추는 게 아니라, 감정이 극에 달하는 순간 그 감정 자체가 노래가 되는 구조입니다. 처음엔 이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한 두 장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대사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감정이 전달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특히 주인공 엘파바가 혼자 무대 중앙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듯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노래를 듣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인물이 평생 쌓아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장면이었고, 음악이 그걸 대사보다 훨씬 날카롭게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깊어지는 과정을 일반 드라마 방식으로 표현하려면 꽤 많은 러닝타임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데 뮤지컬 영화에서는 내러티브 송(narrative song), 즉 이야기 자체를 노래로 전달하는 기법을 통해 이 과정을 훨씬 압축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이 지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감정선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선과 악의 경계가 외부 기준이 아닌 개인의 상황과 선택으로 나뉜다는 점
- 주인공 엘파바가 끊임없는 편견 속에서도 타인을 포용하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점
- 글린다와 엘파바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이 아닌,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하고 조율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는 점
그리고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라는 설정이 처음엔 판타지적 요소로만 보이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게 단순한 외형 차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가 처음 학교에 등장하는 순간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그 세계관 안에서도 이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평생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성격이 모나지 않고 오히려 동생을 챙기고 글린다를 감싸는 모습이 저는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이유, 사운드와 연출
뮤지컬 영화를 집에서 봐도 되지 않냐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영화관 관람을 강하게 권하는 쪽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운드 믹싱(sound mixing)의 차이 때문입니다. 사운드 믹싱이란 다양한 음원(보컬, 오케스트라, 효과음 등)을 하나의 음향으로 정교하게 합치는 작업입니다. 위키드는 이 부분에 엄청난 공을 들인 작품인데, 집에서 TV 스피커로 들으면 그 레이어가 얼마나 세밀하게 쌓여 있는지 제대로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영화관 돌비 사운드 시스템에서 들으면 오케스트라 음원의 악기 분리감이 확실히 다릅니다. 처음 듣는 음악인데도 어떤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았고,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도 음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결국 OST를 찾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닌지, 실제로 뮤지컬 영화의 OST 스트리밍 소비는 개봉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가온차트).
화면 연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키드의 세트 디자인은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 구조를 의식한 장면 구성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프로시니엄 아치란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액자형 틀로, 뮤지컬 극장에서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는 시각적 구조를 말합니다. 영화가 이 구조를 활용해 장면을 구성한다는 건, 곧 큰 화면에서 봐야 그 연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집 TV로 보면 그냥 예쁜 장면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영화관 스크린에서 보면 마치 실제 뮤지컬 공연장에 앉아 있는 느낌이 납니다.
실제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는 2003년 초연 이후 20년 넘게 롱런한 작품이었으며, 뮤지컬 역사상 가장 높은 티켓 수익을 기록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출처: 브로드웨이 리그(The Broadway League)). 제가 왜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이 정도 스케일의 작품이 영화화됐다는 점 자체가, 단순한 영상화가 아니라 스케일을 더 확장한 작품임을 의미합니다. 그 확장이 제대로 느껴지려면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를 본 이후 타이밍 좋게 국내 내한 공연도 볼 수 있었는데, 뮤지컬과 영화를 모두 경험하고 나서 느낀 점은 둘이 서로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는 클로즈업과 카메라 연출로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전달하는 반면, 무대는 배우의 몸 전체와 공간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다릅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영화 위키드는 영화로서 최선을 다한 선택들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화려한 비주얼 뒤에 꽤 묵직한 감정과 메시지가 있고, 특히 선과 악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 지금 현실과 닮아 있어서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영화라고 가볍게 생각했다가 보고 나서 한동안 계속 떠오르는 영화를 만난다면, 그건 꽤 드문 경험입니다. 위키드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영화관에서, 될 수 있다면 사운드 좋은 상영관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 가온차트 공식 사이트: https://www.gaonchart.co.kr
- 브로드웨이 리그(The Broadway League): https://www.broadwayleagu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