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부산행>을 워낙 인상 깊게 봤던 터라 <반도>도 당연히 좁은 공간에서 숨막히게 쫓기는 영화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가장 무서웠던 건 좀비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서울을 배경으로, 총격과 자동차 추격이 뒤섞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액션 영화라는 표현이 훨씬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폐허가 된 한국, 일반적 믿음과 다른 풍경
<반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 장르로, 재난 자체보다 그 이후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중심에 놓습니다. 이 점에서 <반도>는 <부산행>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전작이 재난이 터지는 순간의 공포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이미 4년이 지난 뒤 무너진 일상이 새로운 정상이 된 세상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부산행>의 속편이라고 하면 비슷한 긴장감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봐보니 공간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열차라는 밀폐 공간에서 앞뒤로만 이동하던 인물들이 이제는 폐허가 된 서울 도심을 자동차로 질주합니다. 이것은 서사 구조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장소, 인물의 이동 경로가 결합되는 방식을 말하는데, <부산행>의 선형적 구조와 달리 <반도>는 폐허 도시 전체를 열린 무대로 삼습니다.
이 변화가 화면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폐허 시각화 방식입니다. 버려진 차량이 겹겹이 쌓인 도로, 간판이 낡고 건물 외벽이 허물어진 거리.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이 유독 낯설게 느껴진 이유는 우리가 평소 오가던 서울의 모습이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공간이 낯선 방식으로 변형될 때 관객이 느끼는 이 감각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효과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언캐니 밸리란 원래 로봇공학에서 나온 개념이지만, 친숙한 것이 미묘하게 달라졌을 때 느끼는 심리적 불편감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어 쓰입니다.
<반도>의 폐허 풍경이 효과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관객이라면 영화 속 서울 거리를 자신의 기억과 겹쳐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가 직접 보면서 꽤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반도>가 보여주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재난 상황에서 인간 집단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심리학 연구들은 협력과 폭력 모두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 속 생존자 집단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이용하는 모습은 과장처럼 보이지만, 사회적 규범(Social Norms)이 붕괴된 환경에서의 행동 변화를 다룬 연구들과 결이 닿아 있습니다. 사회적 규범이란 집단이 암묵적으로 따르는 행동 기준을 말하는데, 이것이 무너지면 인간은 본능적 생존 논리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핵심 포인트:
- <부산행>과 같은 세계관이지만 인물과 사건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구성됨
- 재난 발생 직후가 아닌 4년 후의 붕괴된 일상을 배경으로 함
- 밀폐 공간의 공포 대신 개방된 도시를 무대로 한 액션 중심으로 장르가 전환됨
- 서울 실제 거리의 폐허화가 한국 관객에게 특유의 심리적 이질감을 유발함
자동차 액션의 볼거리와 캐릭터 감정선의 간극
<반도>에서 제가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후반부 자동차 추격 시퀀스입니다. 시퀀스(Sequence)란 영화에서 하나의 사건 단위로 묶이는 장면들의 연속을 뜻하는데, 이 추격 시퀀스는 좀비 떼가 쏟아지는 폐허 도로 위에서 차량들이 뒤엉키는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집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빠른 편집과 속도감이 느껴졌는데, 극장 대형 스크린과 사운드 시스템으로 봤다면 체감 밀도가 상당히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좀비 영화에서 공포는 폐쇄된 공간과 탈출구의 부재에서 나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반도>는 이 공식을 거꾸로 뒤집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고 공간이 열려 있으니 좀비의 위협이 <부산행>만큼 압박감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CGI(Computer-Generated Imagery)를 활용한 대규모 군중 좀비 장면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활용합니다. CGI란 컴퓨터로 실제 촬영 없이 만들어내는 시각 효과로, <반도>에서는 수백 명의 좀비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장면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이 오히려 좀비를 배경적 요소로 만들어버려 공포감보다는 게임 미션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점은 분명한 한계입니다.
강동원이 연기한 정석 캐릭터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강동원은 말보다 표정과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인데, 정석은 죄책감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죄책감처럼 내면의 심리를 다룰 때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심리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흐름이 뚜렷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액션 전개를 빠르게 몰아가다 보니 정석의 감정 변화가 충분히 무르익기 전에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 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반면 이레 배우가 연기한 준의 운전 장면은 오히려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드는 포인트입니다. 어린아이가 폐허가 된 도시를 자유자재로 누비는 설정은 현실적으로 보면 과장이지만, 이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붕괴된 세상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다르게 읽힙니다.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에서 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그려지는데, <반도>의 준은 오히려 생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입니다. 이 설정 하나가 이 세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너진 채로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영화 산업 측면에서 보면 <반도>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어디까지 스케일을 키울 수 있는지를 실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0년 개봉 당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반도>는 국내 누적 관객 수 380만 명을 기록하며 해당 연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관객이 그 어려운 시기에도 극장을 찾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의 액션이 작은 화면보다 큰 화면에서 봐야 제맛이라는 기대감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반도>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기대 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산행>에서 느꼈던 밀폐된 공간의 공포와 인간관계의 긴장감을 기대했다면 분명히 아쉬울 수 있습니다. 반면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 대규모 자동차 액션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좋아한다면 꽤 볼거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두 기대를 동시에 갖고 봤기 때문에 재미와 아쉬움이 반반으로 남았습니다.
<반도>는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보다 스펙터클에 더 많이 기댄 작품이지만, 폐허가 된 한국이라는 설정이 던지는 질문은 꽤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전작과 비교하지 않고 독립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액션 영화로 접근하는 것이 이 작품을 즐기는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참고: - 한국심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