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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보기 전까지 "마블 영화는 다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주적 스케일, 화려한 CG, 세계 멸망 위기. 그 공식이 반복될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이건 내가 알던 마블이 아니다"였습니다. 액션보다 가족 이야기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빌런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웬우라는 빌런이 남긴 것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웬우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마블 빌런은 세계 정복이나 파괴를 목표로 삼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웬우는 달랐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아내를 되찾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악의가 아니라 상실에서 비롯된 인물이라는 점이, 저한테는 꽤 오래 남았습니다.
양조위의 연기는 그 감정을 거의 대사 없이 전달합니다. 눈빛 하나, 멈추는 타이밍 하나로 캐릭터 전체가 설명되는 느낌이었습니다. MCU 페이즈4(Phase 4), 즉 어벤져스 이후 새롭게 재편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네 번째 단계에서 웬우만큼 입체적인 빌런이 또 나왔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웬우와 샹치의 관계는 단순한 주인공 대 악당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상처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습니다. 웬우는 힘으로 과거를 되돌리려 했고, 샹치는 아무것도 없던 척 도망쳤습니다. 그 대비가 영화의 감정선을 끌고 갑니다.
샹치에서 웬우를 평가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계 정복형 빌런이 아닌, 감정적 동기로 움직이는 캐릭터
- 강압적 지도자의 얼굴과 사랑에 빠졌던 아버지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인물
- MCU 빌런 중 드물게 관객의 공감을 유도하는 설계
텐 링즈, 설정의 재해석이 통했다
텐 링즈(Ten Rings)는 원래 마블 코믹스에서 만다린(Mandarin)이라는 캐릭터와 연결된 소재입니다. 여기서 만다린이란 마블 코믹스에서 1964년부터 등장한 빌런으로, 아이언맨의 오랜 숙적으로 설정된 인물입니다. 과거 MCU에서 이 설정을 한 번 어설프게 다뤘다가 팬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됐던 전례가 있습니다.
샹치는 그 논란을 덮는 대신 아예 새로운 해석으로 가져갑니다. 텐 링즈를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수천 년의 역사와 저주를 품은 유물로 재정의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납득이 됐던 이유는, 설정 자체가 웬우의 비극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졌기에 오히려 더 큰 것을 잃어버린다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캐릭터 원형 측면에서 보면, 샹치는 1973년 마블 코믹스에 처음 등장한 인물입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아시아 문화를 반영한 캐릭터였지만, 현대적으로 보면 일부 표현이 고정관념에 기댄 측면도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 원형(archetype), 즉 특정 유형의 반복적 캐릭터 틀을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현대적 맥락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선택은 잘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 역사와 MCU의 재해석 방식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마블 공식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Marvel Entertainment).
무술 액션, 기존 MCU와 뭐가 달랐나
일반적으로 마블 액션은 초능력이나 하이테크 장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샹치의 버스 전투 장면은 그 공식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이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신체 하나로 상황을 돌파하는 방식이, 제가 알던 히어로 영화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이 장면의 연출은 홍콩 누아르 무협 영화의 와이어 액션(wire action) 기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와이어 액션이란 배우를 와이어로 연결해 공중 동작이나 빠른 움직임을 연출하는 촬영 기법으로, 홍콩 무협 영화에서 고유한 미감을 만들어온 방식입니다. 샹치의 액션은 단순히 이 기법을 가져온 게 아니라, 샹치라는 캐릭터의 감정 상태와 맞물려 움직이게 설계됐습니다.
배우 시무 리우는 이 역할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신체 훈련을 소화했습니다. 동작 자체가 캐릭터의 과거,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과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갈등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인상을 줬습니다. 아시아계 배우가 MCU 단독 주인공을 맡은 사례로는 2021년 당시 처음이었으며,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다양성 확대라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USC 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
다만 솔직히 말하면, 후반부 타로(Ta Lo)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판타지 전투는 초반 액션과 온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실적 무술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CG 중심의 화면이 이어지면서, 제 경험상 이 부분은 기존 마블 공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MCU가 아시아 문화를 다루는 방식
샹치는 동양 신화와 무협 미학을 MCU 안에 끌어들인 첫 번째 작품에 가깝습니다. 타로라는 공간은 중국 전통 설화 속 신수(神獸)와 판타지적 자연을 결합한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시각적으로는 분명히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이 "아시아 문화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완전한 답을 내놓았는지는 조금 유보하고 싶었습니다.
세계관 구축(world-building), 즉 영화 속 독자적인 설정과 규칙 체계를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면에서 타로는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일부 장면에서 동양적 요소가 배경 장치로 소비되는 인상도 없지 않았습니다. 샹치 자신의 내면 갈등이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면, 그 배경이 더 의미 있게 연결됐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마블이 새로운 방향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과학 기술이나 우주 스케일에 기대지 않고, 가족과 정체성이라는 감정적 무게를 중심에 놓는 방식은 앞으로 더 다양한 히어로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샹치가 완벽한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주인공의 내면 갈등이 조금 빠르게 처리되는 부분도 있고,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의 분위기가 희석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웬우라는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MCU를 꾸준히 봐온 분이라면 물론이고, 가족 드라마와 무술 액션이 조화된 영화를 찾는다면 한 번은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 - 마블 공식 캐릭터 아카이브 Marvel Entertainment
- USC 애넌버그 인클루전 이니셔티브 다양성 보고서 USC 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