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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영화를 챙겨보는 편인데, 이터널스는 처음 보는 내내 뭔가 낯선 감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빠른 농담도 없고, 익숙한 어벤저스 멤버도 없고. 그런데 끝나고 나서 오히려 오래 머릿속에 남더라고요. 기존 MCU와 다른 길을 선택한 이 영화, 정말 실패작일까요? 저는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MCU 세계관이 꺼낸 가장 오래된 신화
이터널스의 원작은 전설적인 만화가 잭 커비가 1976년에 창작한 코믹스입니다. 잭 커비는 판타스틱 포, 캡틴 아메리카 등을 공동 창작한 인물로, 코믹스 역사에서 독창적인 우주 신화적 세계관을 구축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이터널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스케일이 크고 철학적인 작품에 해당합니다.
영화 속 이터널스는 셀레스티얼(Celestial)이라는 존재의 명령을 받아 지구에 파견된 종족입니다. 여기서 셀레스티얼이란 우주적 차원에서 행성의 탄생과 소멸을 관장하는 거대한 존재를 의미하며, MCU 세계관에서 사실상 신의 위치에 해당합니다. 이 설정 하나만으로도 기존 히어로 영화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걸 예고하죠.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당황했던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 담으려다 보니, 초반부 20~30분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현대 런던까지 시간축이 계속 바뀌는데, 관객 입장에서는 캐릭터 이름을 익히기도 전에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 버립니다.
MCU가 페이즈 4(Phase 4)로 진입하면서 기존 어벤저스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세계관을 확장하는 흐름을 보였는데, 이터널스는 그 확장 방향이 가장 급진적이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페이즈란 MCU가 영화를 묶어 출시하는 단위로, 페이즈 1이 아이언맨에서 어벤저스로 이어지는 구간이라면 페이즈 4는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후 새로운 히어로와 세계관을 도입하는 시기를 가리킵니다.
캐릭터 분석: 10명의 이터널스, 저울질의 실패와 성공
이터널스의 가장 큰 구조적 도전은 무려 10명의 신규 캐릭터를 한 작품에서 동시에 소개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MCU 역사상 이 정도 규모의 신규 캐릭터를 단번에 도입한 사례는 사실상 없었습니다. 어벤저스도 페이즈 1 내내 각 캐릭터에게 독립 영화를 부여한 뒤에야 한 자리에 모였으니까요.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이겁니다. 스프라이트나 드루이그 같은 캐릭터는 설정만 놓고 보면 충분히 독립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너무 짧아서,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기 전에 장면이 넘어가 버립니다.
그나마 제대로 살아난 캐릭터를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르시(젬마 찬): 전투력보다 공감 능력이 중심인 인물. 히어로 영화에서 보기 드문 감성형 주인공입니다.
- 이카리스(리처드 매든): 신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로, 이야기 후반부에야 진짜 색깔이 드러납니다.
- 길가메시(마동석): 국내 관객 입장에서 가장 반가웠던 캐릭터. 힘 하나만으로 소비될 것 같았지만, 서로에 대한 보호 본능과 따뜻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짧은 비중에도 캐릭터의 밀도가 살아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카리스의 내러티브는 영웅적 행동(heroic act)과 도덕적 선택 사이의 긴장감을 다루는데, 여기서 내러티브란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과 구조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악당을 물리친다"는 공식을 벗어나 주인공 스스로가 갈등의 중심에 서는 구조는 히어로 장르에서 쉽게 시도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마블 코믹스를 연구한 논문들에 따르면, 이터널스 원작에서 각 캐릭터는 특정 인간 신화나 신의 원형(archetype)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출처: 마블 코믹스 공식 아카이브). 영화도 이 원형을 일부 가져왔지만, 시간 제약으로 인해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클로이 자오의 연출: 독립영화 감성이 MCU 안으로 들어오면
이터널스의 또 다른 층위는 감독 클로이 자오의 연출 방식입니다. 그는 노마드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감독으로,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과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이 특기입니다. 이터널스에서도 CGI 세트 대신 실제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촬영한 장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제가 볼 땐 이 선택이 영화에서 가장 독보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광활한 황야에서 이터널스가 서 있는 장면이나, 우주적 존재의 등장을 자연 지형과 함께 담아낸 화면은 기존 MCU에서 본 적 없는 영상미였습니다. 폭발과 전투로 볼거리를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무게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 확실히 보였습니다.
다만 이 접근 방식은 동시에 영화의 약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클로이 자오의 독립영화 감성은 관객이 인물에게 충분히 집중할 여건이 마련됐을 때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이터널스는 10명이라는 인원 탓에 감정선이 자꾸 분산됩니다. 한 캐릭터에 몰입하려는 순간 시점이 바뀌어버리는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감독의 의도와 장르의 요구 사이에서 어느 쪽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빌런인 데비안츠(Deviants)의 활용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데비안츠란 이터널스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 원래 인류를 위협하는 포식자를 말합니다. 초반에는 주요 적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실제 갈등의 중심은 이터널스 내부의 선택과 신념 충돌로 이동합니다. 이 구조 자체는 참신했지만, 데비안츠가 너무 이른 시점에 위협감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서사적 긴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영화 평론 매체의 집계에 따르면 이터널스의 로튼 토마토 평론가 점수는 47%로, MCU 작품 중 하위권에 해당합니다(출처: Rotten Tomatoes). 하지만 관객 점수는 78%로 평론가와 상당한 격차를 보였습니다. 이 수치만 봐도 이터널스가 "느리고 난해하다"는 평단의 시각과 "그래도 볼만했다"는 관객 반응 사이에서 얼마나 다른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이터널스를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이카리스의 선택에 대해 생각했거든요.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보고 나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영화보다는 훨씬 낫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이터널스는 "좋은 재료를 가지고 조금 급하게 완성한 영화"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한 것 같습니다. 세계관과 배우, 연출 방향 모두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 가능성을 한 편 안에 전부 쏟아내려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터널스 2편이 나온다면, 혹은 이 캐릭터들이 다른 MCU 작품에서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소개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터널스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마블 액션이 아닌 우주 신화 드라마로 기대치를 조정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 마블 코믹스 공식 아카이브 — 이터널스 원작 코믹스 정보 (https://www.marvel.com/comics/series/96/eternals_1976)
- Rotten Tomatoes — 이터널스 평론가/관객 점수 집계 (https://www.rottentomatoes.com/m/etern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