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발이 잘 안 떼졌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큰 사건 하나 없이 감정만으로 사람을 붙잡는 영화입니다. 지나간 인연을 생각하면 쉽게 털어낼 수 없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특히 오래 남을 겁니다.잔잔한 영화가 왜 더 오래 남는가제가 직접 영화관에서 볼 때는, 처음 30분은 "이게 어디로 가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형적인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따르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말하는데,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흐름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립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문제..
영화관을 나오면서 괜히 SNS를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별 이유도 없이 남의 게시물을 스크롤하다가, 문득 그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죽었다'를 보고 나서 생긴 일입니다. 단순한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서야 이게 단순히 사건을 쫓는 영화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관찰이라는 행위가 어디서 범죄가 되는가저도 처음에는 영화 설정이 좀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일상을 훔쳐본다는 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황당함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건 완전히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관음증적 성향(voyeuristic tendency)이라고 분류합니다. 여기서 관음증적 성향이란 타인의 ..
유튜브에서 아폴로 11호 관련 영상을 보다가 댓글란을 스크롤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달 착륙 영상을 보다가 "전부 세트장에서 촬영한 거다"라는 댓글들을 보고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니 묘하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봤을 때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아폴로 계획, 영화가 건드린 상상력의 출발점이 영화는 1960년대 미국 우주 개발의 상징인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폴로 계획이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NASA가 주도한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로, 냉전 시기 소련과의 우주 패권 경쟁 속에서 추진된 국가적 사업입니다. 영화는 이 역사적 사실 위에 "만약 달 착륙이 실..
저는 '리볼버'라는 제목만 보고 총격 액션이 주를 이루는 영화라고 짐작했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이었습니다. 범죄 영화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사람의 선택과 그 결과, 그리고 한번 어긋난 관계가 얼마나 쉽게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절제된 연기가 만들어내는 압박감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배우들이 감정을 얼마나 철저하게 안으로 눌러 담는가였습니다. 보통 범죄 스릴러라고 하면 긴장된 음악과 과장된 표정 연기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리볼버는 정반대의 방식을 택했습니다.전도연의 연기는 그 안에서도 단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른바 내면 연기, 쉽게 말해 대사나 몸짓보다 눈빛과 미세한 표정 변화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인데, 전도..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팀 버튼 감독 스타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친구 추천으로 팀 버튼 영화를 몇 편 몰아봤을 때도 처음엔 그냥 "왜 이렇게까지 만들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비틀쥬스 비틀쥬스를 보고 나서야 그 기묘한 감성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됐습니다.팀 버튼의 세계관과 미장센이 만드는 낯선 매력이 영화는 1988년작 비틀쥬스의 속편입니다. 제목 자체가 이미 장난 같은데, 비틀쥬스를 세 번 부르면 그가 소환된다는 설정 때문에 제목을 두 번만 반복한 것 같습니다. 그럼 3편은 비틀쥬스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되는 건지, 그 순간 영화관 전체가 소환 의식 현장이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영화의 세계관 자체는 현실과 사..
추격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정작 추격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속도감? 아니면 반전? 저는 '필사의 추격'을 보고 나서야 그 답이 '불안감의 현실성'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익숙한 장르인데 유독 몰입감이 좋았던 이유, 데이터와 제 경험을 엮어서 풀어보겠습니다.한국형 추격 장르가 선택한 구조적 정직함영화 장르론에서 '추격 서사(chase narrativ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쫓고 쫓기는 이원 구도가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서사 방식을 의미합니다.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는 이 구조 위에 복잡한 음모론이나 세계관을 얹는 방향을 선택해왔는데, 최근 한국 상업 영화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필사의 추격'은 플롯 레이어(p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