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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둘 중 누가 옳은가. 2016년 개봉 당시 이 질문 하나로 인터넷이 들끓었습니다. 저도 영화관 가기 전부터 친구들과 편을 갈랐는데, 당시엔 아이언맨이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오면서는 그 확신이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신념 충돌이 만들어낸 가장 현실적인 갈등
혹시 영화를 보면서 어느 한쪽만 응원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으셨나요? 제게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갈등의 출발점은 소코비아 협정입니다. 소코비아 협정이란 어벤져스의 활동을 유엔 산하 기구가 감독하고 승인하도록 규정한 국제 조약으로, 뉴욕과 소코비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피해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토니 스타크는 이 협정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만든 울트론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억이 있으니, 책임을 지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논리입니다.
반면 스티브 로저스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합니다. S.H.I.E.L.D.가 하이드라에 잠식되는 것을 직접 경험한 그에게, 권력 기관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S.H.I.E.L.D.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히어로들과 협력하던 비밀 국제 안보 조직으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내부 부패가 드러난 바 있습니다.
제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아이언맨 편이 맞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 제가 규칙과 제도를 믿는 편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캡틴 아메리카의 입장을 곱씹어 보면, 제도가 항상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가 어느 한쪽을 절대적인 정답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갈등 구조는 원작 코믹스에서도 이미 마블 역사상 가장 복잡한 이벤트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2006년 마크 밀러가 집필한 원작은 초능력자 등록법, 즉 슈퍼히어로의 신원을 정부에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MCU에 맞게 재구성했고, 개인적으로는 그 선택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소코비아 협정 이후 갈라진 앙상블의 무게
공항 전투가 시빌 워에서 가장 화려한 장면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감정적으로 무거운 장면은 어디였을까요?
저는 단연 마지막 벙커 결투라고 생각합니다. 세 사람만 남은 좁은 공간에서 버키가 하워드 스타크를 죽인 진실이 폭로되는 순간,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집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얼굴에서 평소의 아이언맨다운 유머는 완전히 사라지고, 분노와 슬픔과 배신감이 동시에 올라오는 것이 화면 너머로 전해졌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이 정도 감정선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제게 깊게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앙상블이란 여러 배우와 캐릭터가 함께 등장해 각자의 비중을 유지하며 극을 이끄는 방식을 말합니다. 시빌 워는 이 앙상블 구성이 특히 까다로운 작품이었습니다. 등장하는 히어로만 해도 열 명이 넘기 때문입니다.
시빌 워에 등장하는 주요 히어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
-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 블랙 위도우
- 팔콘
- 워 머신
- 스칼렛 위치
- 비전
- 앤트맨
- 호크아이
- 블랙 팬서
- 스파이더맨
이 중에서 채드윅 보스먼이 연기한 블랙 팬서는 짧은 등장만으로도 존재감이 달랐습니다. 복수를 위해 움직이다가 마지막에 증오를 스스로 내려놓는 선택은, 다른 캐릭터들이 감정에 휩쓸리는 것과 대비되어 훨씬 더 깊이 있어 보였습니다.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도 MCU 첫 등장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러웠고, 공항 전투의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도 잘 해냈습니다.
다만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 기존 멤버 일부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대형 앙상블 영화에서 서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시빌 워는 그 균형을 꽤 잘 잡았다고 봅니다.
미국 영화 협회(AFI)는 시빌 워를 2016년 올해의 영화 10편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출처: American Film Institute). 단순한 블록버스터 액션이 아니라, 서사와 감정 구조 면에서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은 셈입니다.
빌런 없는 이야기가 더 오래 남는 이유
시빌 워에서 진짜 빌런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명목상의 빌런은 헬무트 제모입니다. 하지만 그는 초능력도, 거대한 조직도 없습니다. MCU 내러티브(narrative) 구조에서 내러티브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의미하는데, 시빌 워는 이 내러티브를 빌런의 힘이 아니라 영웅들의 심리적 약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끌어갑니다. 제모는 버키에 관한 진실을 적절한 순간에 터뜨리는 것만으로 어벤져스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듭니다. 이 점이 오히려 더 무섭고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도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캐릭터 아크란 한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면서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말합니다. 크리스 에반스의 캡틴 아메리카는 시리즈를 거치며 가장 완성된 캐릭터 아크를 그려온 인물인데, 시빌 워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념을 위해 방패를 내려놓는 마지막 선택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것에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으로 읽혔습니다.
영화 비평 집계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시빌 워는 신선도 지수 90%를 기록하며 MCU 전체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합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이 수치는 전문 비평가들과 일반 관객 모두에게 고르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MCU에서 가장 여러 번 다시 본 작품 중 하나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볼 때마다 누가 옳은지를 따지기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선택이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이 이후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의 비극을 훨씬 더 무겁게 만든다는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시빌 워는 히어로 영화를 처음 보는 분보다는 MCU 흐름을 어느 정도 따라온 분들에게 훨씬 더 깊이 와닿는 작품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까지 보고 나서 이어서 감상하는 것을 권합니다. 그래야 소코비아 협정이 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토니의 죄책감이 얼마나 오래 쌓인 것인지를 온전히 느낄 수 있으니까요.
참고: - American Film Institute (AFI) — 2016 AFI Award 선정 목록: https://www.afi.com
- Rotten Tomatoes —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비평 집계: https://www.rottentomato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