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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시작부터 농담이 이어지는데 '이게 진짜 토르 영화 맞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몇 년 뒤 집에서 다시 틀었을 때, 같은 영화가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웃음 뒤에 상실과 성장이 이렇게 단단하게 쌓여 있을 줄은 처음엔 몰랐습니다.

분위기 전환: 왜 이 영화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혹시 토르 1편과 2편을 보고 3편 예고편을 처음 접했을 때 어리둥절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그랬습니다. 네온 색감에 레트로 록 사운드, 그리고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연출. 기존 시리즈가 북유럽 신화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면, 라그나로크는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이 변화를 이끈 건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의 미장센(mise-en-scène)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의 모든 시각 요소, 즉 색채, 조명, 배우 배치, 세트 디자인을 통합적으로 연출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라그나로크에서 이 미장센은 1980년대 SF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원색 계열의 색채 팔레트와 복고풍 그래픽으로 구현됩니다. 사카르 행성의 화려한 세트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이건 기존 MCU랑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음악도 빠질 수 없습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스코어(orchestral score) 대신 레드 제플린의 '이민자의 노래'가 쾅 터져 나오는 순간, 토르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재정의됩니다. 오케스트라 스코어란 영화 전용으로 작곡된 관현악 음악을 뜻하는데, 기존 마블 영화들이 이 방식을 주로 써왔던 것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습니다. 제게는 이 선택은 단순한 차별화가 아니라, 토르라는 캐릭터가 더 이상 '왕좌를 향해 달려가는 왕자'가 아님을 음악으로 먼저 선언하는 것 같았달까요.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최후 전투와 세계 멸망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영화는 이 신화적 개념을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메시지로 재해석했는데, 이 방향 전환이 단순히 유머를 더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캐릭터 성장: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여러분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라그나로크의 토르가 정확히 그 과정을 밟습니다. 아버지 오딘을 잃고, 상징이었던 묠니르(Mjölnir)를 잃고, 고향 아스가르드마저 잃습니다. 저는 처음 극장에서 볼 때 이 상실들이 그냥 '사건'처럼 지나쳤는데, 두 번째로 봤을 때는 각각의 장면이 토르의 정체성을 한 겹씩 벗겨내는 과정이라는 게 보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 안에서 인물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내면의 여정을 뜻합니다. 토르의 아크는 단순히 강해지는 게 아니라, 외부적인 힘의 상징에 의존하던 자신에서 벗어나 내면의 본질을 찾는 과정입니다. 크리스 헴스워스 본인이 코미디 연기 아이디어를 적극 제안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유머가 오히려 이 아크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긴장을 풀어야 비로소 진짜 감정이 드러나는 것처럼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빌런 헬라도 이 성장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헬라가 단순히 강한 적이 아니라 아스가르드의 어두운 역사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토르가 그녀와 맞서는 것은 자신의 뿌리와도 마주하는 행위입니다. 제 경험상 MCU 빌런 중에서 등장하는 것만으로 화면이 달라지는 인물은 손에 꼽는데, 헬라는 분명 그 안에 있습니다.
라그나로크에서 주목할 만한 캐릭터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토르와 헐크: 친구이면서도 경쟁자. 사카르에서의 재회 장면은 유머와 감동을 동시에 건드립니다.
- 토르와 로키: 불신과 신뢰가 반복되는 관계. 이 긴장감이 영화 내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 토르와 오딘: 짧지만 가장 묵직한 작별. 오딘의 마지막 대사는 두 번째 감상에서 훨씬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워리어즈 쓰리(Warriors Three)는 퇴장이 너무 빨랐고, 헬라의 과거도 조금 더 깊이 다뤄졌다면 빌런의 무게감이 한층 강해졌을 것 같습니다. 캐릭터가 매력적인 만큼 활용이 아쉽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재감상: 처음과 두 번째가 이렇게 다른 영화
영화를 두 번 봤을 때 평가가 올라간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라그나로크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머가 많아 살짝 가벼운 오락 영화처럼 봤는데,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모두 본 뒤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아스가르드가 불타는 장면과 오딘의 마지막 말은 처음 볼 때와 비교해 감정의 무게가 달랐습니다.
오딘이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는 이 대사는 영화의 내러티브 테마(narrative theme)를 한 줄로 압축합니다. 내러티브 테마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의식을 말합니다. 이 테마는 단순히 집이 불타도 괜찮다는 위로가 아니라, 공동체의 본질이 공간이 아닌 사람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멋진 대사로 들렸는데, 재감상에서는 영화 전체가 이 한 줄을 향해 달려갔다는 게 보였습니다.
영화의 상업적 성과도 이 재평가를 뒷받침합니다. 라그나로크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약 8억 5,30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로튼 토마토 기준 신선도 지수 93%를 달성해 토르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또한 마블 스튜디오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 작품은 MCU 3단계(페이즈 3) 내에서도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균형 잡힌 성과를 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출처: Marvel Studios).
유머의 밀도에 대한 호불호는 지금도 갈립니다.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장면에서 바로 농담이 끼어드는 연출은 저도 여전히 조금 아쉽게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토르라는 캐릭터를 '완성'에 가깝게 만든 작품이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두 번째에 더 높은 점수를 주게 된 몇 안 되는 마블 영화였습니다.
토르: 라그나로크를 아직 한 번만 보셨다면, 다시 한번 틀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인피니티 워나 엔드게임 이후에 보면 웃음 뒤에 숨어 있던 이야기의 결이 훨씬 또렷하게 들립니다. 처음엔 그냥 재밌는 영화였는데, 두 번째엔 꽤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 차이를 직접 느껴보시는 게 이 영화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